[서울가족학교 후기] 그렇게 가족이 된다

그렇게 가족이 된다 

2021 서울가족학교 우수후기 공모전 전체부문 대상 (원천보/강남구센터)

 

아내는 토요일 아침에 뭘 같이 해야 한다며 그날만큼은 일찍 일어나 주길 부탁했었다. 하지만, 전날 늦게까지 영화를 보느라 달콤한 침대의 유혹을 떨쳐 내기는 쉽지 않았다.

‘그냥 좀 혼자 하면 안 돼?’

‘맘대로 해라’

차가운 한마디를 던지고 방문을 쾅 닫고 나갔다. 문밖에서 아내의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절대 맘대로 해선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 겨우 세수를 하고 무거워진 눈꺼풀을 치켜세워 본다.

거실에 나가니 아이와 아내가 노트북 앞에 앉아 있다. 아이는 커다란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본다. 빨리 와 앉으라고 손짓을 한다. 한눈에도 아이가 기대하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몇 분 같이 앉아 있다 보니 대충 상황이 파악됐다. 강남구건강가정·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진행하는 가족 요리 프로그램이고, 줌으로 진행이 되며 중간에 진행자가 가족과 상담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 몇 시간 앉아 있는 것으로 가족의 평화가 온다면’

일단 앉았지만 좀처럼 집중이 될 리가 없다. 유일한 위안거리인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어제 유럽 축구 경기의 하이라이트 영상을 확인하고 있었다. 아내의 눈빛을 보니, 못마땅하지만 그렇게라도 앉아 있는 것으로 일단 타협이 된 것 같다. 그러나 복병이 있었다.

‘아빠, 휴대폰 좀 그만하면 안 될까요?’

아이가 나의 손을 잡으며 말한다. 아이의 얼굴을 보니 거부할 수 없는 표정이다. 궁지에 몰린 나를 옆에서 킥킥대는 아내가 너무 얄밉다.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에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긴 했지만 머릿속에선 축구 경기가 한창이다.

원래 나는 이런 식의 프로그램에 대한 믿음이 별로 없었다. 오글거리는 뻔한 질문과 대답이 오고 가고, 프로그램이 끝나면 머릿속에 남는 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솔직히 지금 많은 것들이 기억에 남아 있지는 않다. 하지만, 희미해진 기억 속에서도 이 프로그램이 내가 경험한 가족 프로그램 중에 가장 좋았다고 누구에게도 권할 수 있다. 그날 많이 웃었고, 행복했던 기억만큼은 또렷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3~4시간 동안 가족의 모든 구성원이 함께 요리를 만들어야만 하는 상황이 주어진다. 캠핑 같은 것을 하지 않는 집이라면 의외로 아이와 함께 요리를 같이 만들어 볼 기회는 거의 없다. 요리를 만들 때는 최대한 빠르고, 효율적으로 만들지, 아이와 시간을 보내기 위한 것이 목적이 아니다. 맞벌이 부부인 우리에게 식사는 그저 먹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그리고, 평소 주방이 아이에게 위험한 공간이라고 생각했던 나에게는 더욱 그런 기회를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시작부터 아이와 요리를 함께 만드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나는 빠르게 만들고 쉬고 싶은데 아이는 서툴고, 느리기 때문이다.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아이와 음식을 함께 만드는 것이 얼마나 멋진 경험이 되는지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시작은 다소 어렵다. 위험한 주방 도구들의 사용법부터 대화가 시작된다. 이 대화가 모두 긍정적으로 흘러가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평소라면 잘 따라 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핀잔을 줄 법도 하다. 하지만, 중간에 진행자가 가족의 의미를 상기시키면서 프로그램이 진행되기 때문에 아이의 실수에 대해 너그러운 마음이 된다. 다른 가족들이 화목하게 요리를 만드는 모습에서도 자극을 받게 된다. 건전한 자극이다. 아이도 처음에는 내 눈치를 보다가 어느덧 요리 만들기에 빠진다. 즐거워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다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이에게 너무 많은 제약을 두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금방 배우는데, 나는 아이에게 허락하는 법을 배우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진행자가 묻는다.

‘평소 가족들에게 미안한 그것 있으셨나요?’

‘너무 많은 것들을 막고 있었습니다. 실수할 수 있는 기회도 필요한 건데’

‘아이에게 바라는 점이 있을까요?’

‘그저 자기가 사랑할 수 있는 일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아이에게 낯간지러워서 할 수 없었던 말이 술술 나왔다.

옆에서 조용히 나의 말을 듣고 있던 아이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의 진심이 통하지 않았더라도 온전히 내 탓일 것이다. 그날 점심은 당연히 함께 만든 음식이었다. 우리는 서로 음식에 대한 간략한 평을 했다. 아내가 먼저 포문을 연다.

‘난 오늘 당신이 짜증 안 내고 끝까지 함께 해서 고마웠어’

아내의 말속에는 작은 가시 하나가 박혀 있다. 아침에 나는 분명 짜증을 냈기 때문이다. 격려와 경고를 한 문장에 넣을 수 있는 아내의 언어 능력은 대단하다.

‘나는 이 음식이 맛도 있지만, 보기가 너무 예쁜 것 같아요’

플레이팅을 담당했던 아이가 자기를 칭찬해 주길 기대하며 던진 말이다.

평소라면, ‘뱃속에 들어가면 다 똑같아’라며 잔칫상에 찬물을 한 바가지 끼얹으며 ‘빨리 밥이나 먹자’를 재촉하겠지만, ‘그래, 우리 이거 사진 찍어서 가족들에게 보낼까?’라고 제안을 했다.

음식 사진을 찍어 가족 단톡방에 올렸다. 아이는 신이 나서 친척 한 명 한 명에게 전화를 걸어 이 떡볶이는 궁중 떡볶이로 사전에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평범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과거 왕에게 진상되었던 귀한 음식이며, 치즈와 어묵은 느끼할 것 같지만 막상 해보니 양념통닭이나 치즈떡볶이와 함께 반열에 오를 영혼의 짝꿍으로 심지어는 만들기도 어렵지 않은 숨겨진 보배 같은 음식이며, 우리집에서 이 음식을 같이 먹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운 감정을 세세히 드러내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급 소감을 전했다. 또한, 기회가 된다면 자신이 다시 음식을 만들어서 초대할 수 있는 시간을 곧 마련하겠노라며 만찬에 초대받지 못한 상대방을 위로하는 넉넉한 아량도 잊지 않았다. 아쉽게도 이 어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약속은 정치인들의 선거철 공약처럼 지금까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아내는 원래 이 프로그램은 부모 중 한 명만 있으면 되는 것이라는 식스센스급 반전을 전했다. 아내에게 쌔게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라 인상을 찌푸리자마자 ‘아이가 아빠와 함께하길 원했다’는 말과 함께 커밍아웃 하는 바람에 묘하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역시 아내는 나보다 한 수 위다.

분명 토요일의 달콤한 늦잠보다 값진 시간이었다. 그날의 창문 너머 드리우던 따뜻했던 햇살, 거실에 들리던 경쾌한 음악, 아이의 눈부신 웃음소리와 나를 향한 아내의 핀잔마저 우리를 ‘가족’으로 만들고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날 나는 너그러움을, 아내는 용서를, 아이는 성취감을 경험했다. 사람은 한 번에 바뀌지 않고, 기억은 시간 앞에 무기력하다. 그래서 원래의 나로 돌아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주말에 놀러 가기 싫어해서 아이나 아내에게 주말 나들이의 최대 걸림돌이자 공공의 적이다. 외출이나 방콕이냐, 나의 최종 결정만을 기다리며 시무룩하게 나를 쳐다보는 아이를 마주할 때, 그날 내가 보았던 아이의 자부심이 배어 있었던 얼굴을 떠올리게 된다. 그 아이의 얼굴에 숨겨져 있던, 빛나고 멋진 미소를.

그래서 가끔 생각을 바꿔 보기도 한다.

‘그래, 어디 갈지 한번 생각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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