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가족담쟁이 “힘내라, 워킹맘!!” 이야기 공모 당선작 - <미안하고 고마운 내 아이>
행복가족담쟁이 “힘내라, 워킹맘!!” 이야기 공모 당선작입니다. ^^ 제목 - 미안하고 고마운 내 아이 작성자 - 김민정 IMF 는 치명적 고통으로 우리 가족에게 다가왔다. 평소 나랏일이라 하면 잘 알지 못하는 만큼 관심 또한 부족했던 터라 신문, 방송 등의 매체에서, 연일 심각한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와도 우리 집 이야기는 아닐 것이라 귀담아 듣는 일을 게을리 했다. 열 가구 중 여섯 일곱 가구에서는 실업가장이 생겨날 것이라 경고성 발언들이 들려오긴 했지만, 내게는 그저 강 건너 불 구경, 남의 나라 이야기일 뿐이었다. 무릇 국민이란, 부과되는 세금에 대한 성실한 납부의 의무와, 내 이름 석자를 함부로 남용하여, 범죄 등의 죄질로 나라안팎을 어수선하게 만들지 않으면 되는 것이라 여겨 살아온 나태함이 무식함을 길렀고 급기야 용감해지기까지 하여 IMF의 심각성은 도무지 눈치조차 알아차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열 가구 중 여섯 일곱 가구에서 생겨난다는 실업가장이 우리 집에서 생겨나 남편의 가슴 한가운데를 무겁게 짓눌렀다. 전세 보증금의 일부를 월세로 돌려 시작한 창업을 일년 삼 개월만에 폐업의 수순을 밟아 정리를 하고, 알음알음 지인 의 소개로 3D 업체 열두시간 교대근무의 일터를 쫓아 취직한지 일년 육 개 월 만에 심신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린 남편은 쓰러지고 말았다. 내일을 알 수 없이 닥치는 대로 하루 하루만을 연명하기에도 숨이 턱에 닿았던 탓에, 딸아이를 유치원에 보낼 수가 없었다. 놀이방도 미술학원도 다닐 수가 없었던 아이는 하루종일을 집안에서만 맴을 돌았다. 아이가 첫돌 때 선물로 들어왔던 블록놀이 장난감을 아이는 일곱 살이 되도록 가지고 놀았다. 이미 마음에서는 열 번도 더 넘게 닳아 없어져 버렸을 블록놀이 장난감을 만들고 부수고를 반복하면서 아이는 하루해를 견뎠다. 그 무렵 아이에게 있어 유일한 학습의 도구는 열 두 색 크레파스 한 통과 스케치북이었다. 스케치북의 인심 또한 넉넉할 수가 없어서 같은 곳에 두 번 세 번씩 그림을 그리는 일쯤은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아주 당연한 일이 되었다. 나중에 다 쓴 스케치북의 검사를 받을 적에 오히려 단 한번의 그림으로만 사용된 장면이라도 발견되면 그 날은 아이의 두 눈 가득 눈물이 고여지고 마는 날이 되곤 하였다. 일주일이면 두 세 번쯤은 엄마 아빠의 싸움소리를 들으며 아이는 살았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이러지 말아야지...머리로서야 그러지 않으려 하루에도 몇 십 번씩 되 뇌이곤 하는 결심들이 무책임하게 무너지고 마는 데엔 불과 삼 초도 걸리지 않았다. 하릴없는 푸념이 구질구질한 넋두리가 되어 버리기 일쑤였고, 고성이 오가고 서로의 가슴에다 그리고 아이의 여린 마음 곳곳에 상채기들을 남기곤 하였던 것이다 그랬던 아이가 2002년 초등학교 일 학년이 되었다. “엄마가 내게 해 준 게 뭐가 있어요?” 만약 꿈에서라도 아이가 내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하염없이 흘려대야 할 눈물 뿐 아무런 할 말이 없는, 내게 있어 그저 바라만 보기에도 미안함에 가슴이 미어지고야 마는, 아이가 작은 어깨에 한아름 가방을 짊어진 체 아침이면 학교로 갔다. 일하는 엄마랍시고 나는 아이의 등굣길에 단 한차례도 보호자 노릇을 해 주지 못하였다. 그 무렵 용케도 남편과 나는 취직이 되었던 것이다. 수입의 내용이야 아직은 다른 가정의 외벌이 수준에도 미칠 수 없을 지경이었으나 그래도 우리는 엄연한 맞벌이 부부였던 것이다. 아침 일곱시면 남편과 나는 집을 나섰다. 아이가 등교를 하는 여덟시 오분이 될 때까지 시어머니가 아이를 돌봐 주셨고, 등교는 입학식 한 달 전부터 연습했던 길을 따라 아이 혼자 감당해야 할 부분이었다. 아이는,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아니 오히려 또래의 아이들보다 훨씬 더 웃자라 있기까지 하였다. 혼자 씩씩하게 잘도 해내는 등/하교, 점점 흥미를 더 해 가는 학교생활, 원만한 교우 관계 등...겉으로 보기엔 평온함 그 자체였고, 이제는 행복하게 살 일만 남았다 안도하고 싶은 나날들이었다. 아이는 진중 했고 단정했다. 어디하나 나무랄 데 없는 아이로,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수많은 틀 속에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게 딱 안성맞춤으로 아이는 자라가고 있었다. 너무나 잘 해주었기 때문에, 어느 부분으로는 엄마 아빠인 우리들보다 더 어른스러움에 감탄하고 흥분하면서 남편과 나는 안도하곤 했었다. 어느 날 문득, 아이의 담임 선생님에게서 영문을 알 수 없는 연락이 오기 전까지 나는 그저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바보 못난이 엄마인 체로 종종거리며 하루를 살고 있었던 것이다. 여덟 살짜리 아이가 마치 팔순의 노파와 같다는 이야기를 아이의 선생님에게서 들었다. 아이는 놀라우리만치 참을성이 강했다. 누군가 아이를 툭 쳐도, 부러 작정한 체 아이를 때려도 아이는 우는 법이 없었다. 꼭 다문 입술 사이로 신음소리가 비어져 나올지언정 아이는 입을 벌려 아프다 소리지르며 대항하는 법이 없었다. 오로지 참고 사는 것만이 삶의 전부라 아는 것만 같았다. 아이가 크게 웃기도 해야 하겠지만, 속 시원히 울기도 해야 할 것이라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가슴 안에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그저 가둬둔 체 생활하는 아이가 위태로워 보인다고 선생님은 걱정하셨다. 그리고 아직은 희미하게나마 보여지는 증상이긴 하지만, 아이에게서 틱 장애가 의심스러운 행동들이 발견되곤 하는데 혹시 알고 있었느냐 선생님은 내게 물으셨다.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의 절대적 필요성과, 놀이동산에 데려가 실컨 고함이라도 지를 수 있게 해 주는 것 또한 하나의 방법이라는 처방전을 받아들고서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눈 앞이 캄캄했다. 하루 소풍을 다녀왔다. 모처럼의 휴일을 맞아 남편과 두 아이를 데리고 놀이동산으로 향했던 것이다. 놀이기구에 올라앉아 구김살 없이 환하게 웃는 아이의 모습에 목이 메였다. 엄마인 나조차도 그런 아이의 모습을 마주 대하는 것이 얼마만 인지 미처 헤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느라 지쳐 늘 미뤄두기만 했었다. ‘나중에 하자, 내일하자, 다음에 하자..’라는 말을 늘 입에 붙이고 살다시피 했었으니, 아이의 얼굴조차 정면으로 마주본 적이 언제였던가 까마득할 지경이었다. 불성실한 엄마임에 분명했던 것이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내내 아이의 두 손을 꼭 잡고서 아이의 목소리에 바짝 귀를 귀울였다. 아이의 아픈 곳이 어디인지, 진정 아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기 위해 양쪽 귀와 온 마음을 활짝 열어두었다. 아이의 목소리를 받아 담아 아이가 원하는 바를 토해내게 하기 위해서였다. 아이가 원하는 건 오로지 단 한 가지 뿐 이었다. ‘엄마’가 집안에 머무는 일...난폭한 동생과,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언제나 아이만을 나무라시는 할머니가 아닌, 무한정 따뜻하게 품어 안아 줄 누군가를 아이는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겨우 여덟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지친 삶에 기대 안겨 울고 싶은 곳을 찾지 못해 울음을 참아 내느라 가슴이 타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그때는 온전히 아이의 편을 들어주지 못했다. 그때의 난 어쩌면 속속들이 아이의 진심을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눈앞에 닥친 현실의 무게가 아이가 안고 있는 마음 병의 심각성을 온전히 알아차리지는 못하게 하였다. 겨우 내가 생각해 낸 것이라고는, 아이에게 아이가 원하는 엄마를 곁에 있게 해 주지 못하는 대신으로, 아이가 집안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을 최대한 줄여주는 것이었다. 난폭한 동생과 엄하기만 하신 할머니와 함께 있는 시간을 최대한 짧게, 아이가 집으로 돌아온 얼마 후면 엄마, 아빠 또한 귀가해서 함께 지낼 수 있도록, 아이가 방과 후에 다닐 수 있는 학원 등을 알아보기로 한 것이다. 아이의 절실함은 외면한 체 현실에 안주하기 위한 얕은 꾀를 부린 것이다. 이번에도 역시 마음을 묻어둔 체 먼저 스스로를 접어준 건 아이가 먼저였다. 늘 그래왔듯 아이는 싫은 내색 한번 하는 법 없이 엄마의 말을 잘 따라 주었다. 미술과 피아노 교습을 함께 받을 수 있는 학원에서 아이는 학과 공부까지 병행하게 되었다. 이제 겨우 여덟 살 일 학년 짜리 꼬마 아이가 오후 다섯시가 넘도록 바깥세상을 전전긍긍 바쁘게 뛰어다니게 된 것이다. 무책임하게도 그러는 동안 나는 아이가 저절로 낫기를 바랬다. 시간이 아이 마음의 병을 치유해 주리라 믿었고, 그 때를 기다렸다. 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아이는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고, 늘 피로에 지쳐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면 간식과 저녁을 먹은 후 곧장 잠에 골아 떨어지는 횟수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말수가 줄어든 대신 아이의 식욕은 점차 늘어갔다. 아이의 입에서는 늘 단내가 났고 손에는 늘 뭔가가 쥐여져 있었다. 아이는 말수를 줄여 과자를 먹고 음료수를 마셨다. 과자를 너무 많이 먹으면 저녁밥맛이 떨어진다고 할머니에게 야단을 맞던 어느 날은, 방문 뒤에 숨어 몰래 과자를 먹는 아이의 모습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아이는 지쳐갔다. 빡빡한 하루 일정도 아이를 힘들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지만, 그 보다 더 심각한 건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는 아이의 몸 상태였다. 제 몸 하나를 제대로 가누지 못할 만큼 아이의 몸이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먹는 양에 비례해 조금씩 살이 찌기 시작하더니, 삼 학년으로 진학해서부터는 서 있는 상태에서 제 발등을 스스로 내려다보지 못할 지경이 되고 말은 것이다. 클 때 찌는 살은 다 키가 되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친정 어머니의 말씀 끝에, 살이 어떻게 키가 될까, 살은 그저 살일 뿐이라 괜스레 어머니 마음만 상하게 해 드린 적도 있었다. 그때의 난 어쩌면 알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마치 베이킹 파우더에 부풀린 아이의 몸이 무엇을 말하는지...아이의 두터운 몸집 안에는 아직도 여덟 살 때의 모습 그대로인 아이가 하나도 자라지 않은 체 머물러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아이를 마주 대하기가 겁이 났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이를 이 지경이 되기까지 방치해 둔 죄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건강에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각종 군것질 꺼리 들을 쉼 없이 사 나른 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아이 엄마인 나였으니 입이 열 개라도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차일피일 미뤄두기만 하는 체로, 불안한 시간들이 하릴없이 지나고 있었다. 아이는 비만으로 인해 점차 소극적인 아이로 변해갔다. 말수 또한 갈수록 줄어져 이제는 묻는 말에나 겨우 대답을 할 지경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아이의 먹성은 줄지 않았다. 먹고 싶어 먹는 아이가 아니라 먹어야 하기 때문에 먹을 수밖에 없는, 마음이 텅 비어 허기진 아이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집 근처 체육공원을 찾은 날 이었다. 휴일이면 가끔씩 찾는 그 곳에서 남편과 아이들 그리고 나는 부족하기 짝이 없는 운동량을 조금이라도 채워 보고져 땀을 흘리곤 하였다. 그 곳에서 남편과 아들아이는 축구를 하기도 하고 베드민턴 놀이를 하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기도 한다. 그 곳에서 딸아이와 나는 줄기차게 달리기만을 한다. 각자 출렁이는 뱃살과 몸살들을 빼 보고저 비지땀을 뻘뻘 흘려대는 것이다. 아빠와 한참동안 공놀이를 하던 아들아이가 지루했음인지 조례대로 성큼성큼 올라가기 시작했다. “누나! 여기에 올라와 봐, 우리 여기서 놀자..” 동생의 손짓에 따라 딸아이도 계단을 오르고, 남편과 나는 그 틈에 가뿐 숨을 돌리고저 벤치에 몸을 쉬었다. 아이들은 아마도 서로 가위바위보를 해 이긴 사람이 한 계단, 두 계단씩을 오르내리는 게임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똑같이 출발선에 서서 가위바위보를 시작하는 모양새가 그래 보였다. 커피를 마실까? 시원하게 생수를 들이킬까? 한가로운 아침나절 풍요한 여유로움을 누려보려는 찰나, 딸아이의 울음보 터지는 소리가 내 신경을 바싹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딸아이는 두 손으로 양쪽 귀를 틀어막은 체 고개 짓을 하며 울부짖고 있었다. 마주 선 아들아이는 양손을 들어 어깨를 으쓱 들었다 내려놓는 폼새로 보아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뜻인 모양이다. 한달음에 아이들에게로 달려갔고, 왜 우는지를 아이들에게 차례대로 물었다. 이유인즉, 딸아이는 겨우 서 너 칸 남짓한 조례대 계단을 내려가기 위해 발을 아래로 딛는 일을 행하지 못하고 있었던 거다. 무섭다는 것이었다. 공포에 질려 눈물범벅 땀 범벅이 된 아이를 마주 대하자니, 두려움에 내가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남편은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고, 아들 녀석은 제 누이를 놀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딸아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온 몸을 사시나무 떨뜻 벌벌 떨면서 단 한발자국도 떼어놓으려 노력하지 않는 것이었다. 우는 아이를 앞에 두고 남편과 아들아이가 시범을 보였다. 때로는 혼자, 또 그 다음에는 둘이 함께 손을 잡고서 조례대 계단을 오르고 내리는 일을 반복하며 아무것도 아님을, 무서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우스운 일임을 아이에게 몸소 시범을 보여준 것이다. 지금의 아이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비단 계단 뿐만은 아니라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이가 지금, 어쩌면 심각하게 마음을 앓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리는 데엔 그리 많이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아이는, 초등학교 삼 학년 인 열 살 바기 내 아이는, 하지만 그 날 제 스스로 조례대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일에는 기어이 실패를 하고 말았다. 우느라 기운을 모두 써 버린 아이를, 지쳐 잠이 들어 버린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가 아이에게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를 진실로 극명하게 실감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며칠 뒤, 출근 길 나의 가방 안에는 사직서가 가지런히 담겨져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구차한 변명들을 늘어놓으며 문제의 심각성을 외면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아이는 과자와 음료수, 그리고 학원의 유익한 프로그램들로 자라는 것이 아니었다. 과자 백 봉지 보다 따뜻한 엄마의 손길 한번이 더 필요한 것이다. 달콤한 음료수의 맛보다 엄마의 품이 몇 배는 더 따뜻한 것이다. 몰랐다 변명만 할 수는 없으나, 사태가 이렇게까지 심각해지라고는 나 또한 예측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앞으로 사는 동안 몇 백 배 사죄하는 마음으로 내 아이 내가 낫게 해주리라 굳은 결심으로, 몇 년 동안 고맙기만 했던 정든 회사를 등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날부터 오롯이 아이만을 위한 삶이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방과 후 아이가 다니던 피아노, 컴퓨터, 논술 학원들을 일체 끊었다. 학교 수업이 땡 하고 마치면 아이는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왔다. 슈퍼마켓에서 파는 과자류 들이 아닌, 엄마가 손수 만들어놓은 간식들을 먹으며 그 날 하루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들을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집안에 과자와 음료수 등을 일체 준비해 두지 않았으며, 공부는 학교공부 외엔 당분간 아이가 뭔가를 원하는 순간이 올 때까지 아이를 쉬게 할 작정이었다. 남편이 귀가해서 온 식구 저녁식사가 끝이 나면 아파트 근처를 배회하며 산책을 하곤 하였는데, 이 일을 아이가 특히 좋아하였다. 그 길 위에서 때로 아이는 울었고, 때로 아이는 큰소리로 깔깔대며 웃기도 하였다. 우리는 잠자리도 바꾸었다. 지금까지 아이는 할머니와 함께 방을 사용하였다. 잠자리에 들기 전, 동생과 엄마와 아빠를 빤히 바라보기만 하다 할머니 방으로 힘없이 건너가곤 하던 아이를 이제부터는 안방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한시적이나마 남편이 작은 방으로 잠자리를 옮겨갔다. 이제부터 큰방에서는 딸 아이와 아들아이를 양쪽에 뉘운 체, 우리 셋이서 잠을 자게 된 것이다. 아이가 잠이 들기 전부터 아이가 잠을 자는 새벽까지 아이는 나에게 이마를 묻고 잠이 들었다. 행여 엄마가 어딘 가로 도망이라도 갈까보아 잠결에라도 아이는 더듬어 나를 찾았으며, 그럴 때면 나는 아이를 원 없이 깊게 안아주었다. 사랑해! 사랑해! 마음껏 속삭여 주곤 했던 것이다. 아이를 입학시켜놓고 단 한차례 참석해보지 않았던 가을 운동회를 그 해 처음 아이의 손을 잡고 달려갔다. 아이가 달리기를 할 때면, 엄마가 열심히 응원을 했고, 학부모 줄다리기에 나가 낑낑대며 힘을 쏟고 있으면 엄마를 위해 목이 터져라 응원하는 모습의 아이가 눈에 보이는 듯 했다. 무엇이든 아이의 의견이 먼저였고, 한마디라도 더 아이에게 말을 붙이고자 나는 늘 아이를 졸졸졸 따라다녔다. 우리는 운동도 함께 했다. 매일저녁 훌라후프와 윗몸 일으키기를 했었는데, 전반적으로 몸치인 나에 비해 아이는 유연한 몸으로 훌라후프 돌리는 법을 익히는 것이 나보다 훨씬 빨랐다. 점차 아이의 웃음소리를 듣는 횟수가 잦아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가끔씩은 마음이 바빠지기도 하였다. 그동안 내가 저질러놓은 행위는 생각지 않은 체 혹시 아이가 이대로 회복되지 않으면 어떡하나! 전전긍긍 마음을 졸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도 생각의 끄트머리에 가서는 언제나 단 한가지의 결론과 마주칠 수가 있었다. 난 내 아이를 믿는다는 것이었다. 곧, 가뿐한 몸과 마음으로 맑고 쾌활한 아이가 되어 활짝 웃어줄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이가 학교에서든, 집에서든 점차 자신감으로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아이가 오 학년이 되면서 부터였다. 학년초 각반에서 반장과 부 반장을 선출하는 자리에 아이가 번쩍 손을 들어 반장과 부 반장 자리에 도전해 보겠다 자청을 했던 모양이다. 나는 그 것만으로도 눈물이 나도록 감사했다. 늘 저 끄트머리 뒤편에 조용히 앉아만 있던 아이였다. 묻는 질문에 명쾌한 대답을 듣기가 무척이나 어렵기만 하던 아이였다. 그랬던 아이가 제 스스로 손을 든 것이다. 제 스스로 목소리를 높여, ‘저를 반장으로 뽑아주신다면...’ 표를 모으기 위해 연설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좋았다. 감사했다. 여기서 더 이상의 것을 원하면 욕심이라 생각했었는데, 아이가 그만 부 반장의 자리를 꿰차고 집으로 돌아왔다. 울음보가 터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한민국 만세, 우리 딸내미 만세...소리지르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이의 오 학 년 일년의 시간들이 아이에게 자신감과 자존감을 심어주는데 혁혁한 공을 들인 시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부 반장이라는 자리의 주인공이 된 이후 많은 부분 아이의 언행들이 달라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학과공부 이외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 또한 오 학년 그 해였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글짓기 분야에서였다. 만약 예민하고 풍부한 감수성이, 많은 독서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면, 일주일에 한번씩은 꼭꼭 동네 도서관에 들려 책을 읽기도 하고, 집에서 읽을 책을 빌려오기도 한 것의 효과가 드디어 빛을 발하는 것 일 테고, 그것이 아니라면, 아이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았던 시절, 마음 안을 수놓았던 많은 이야기들을 이제는 글을 통해 표현해도 괜찮을 만큼, 조금은 마음의 문이 열렸다고 생각해도 좋을 터였다. 그 해 가을 학교대표로 글짓기 대회에 나간 아이는 우수한 성적으로 교장선생님의 상을 받게 되었다. 내려오지 못해 눈물바람이었던 조례대를 성큼성큼 걸어 아이가 내려왔다. 환한 미소를 잃지 않은 체... 스스로 인정하기에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놀고 또 놀던 아이가 공부를 시작한 것 또한 오 학년 이 되고 부터였다. 일 학년부터 사 학년까지의 공부를 몽땅 떼어먹은 후 오 학년 이 되고 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공부라 처음 한동안은 아이를 포함 우리가족 모두가 애를 먹었다. 저녁 늦도록 아이와 수학문제로 씨름을 하느라 남편의 머리가 뜨끈뜨끈해지는 날 들 또한 빈번하기도 했었고, 전과와 문제집, 그리고 인터넷 등을 이용해 아이의 학습진도를 따라가느라 학교 다닐 때도 하지 않던 늦깍이 공부를 하느라 나 또한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지기도 했었다. 부족하나마 아이의 공부를 도우면서 나는 생각하곤 했었다. 나는 진실로 아이가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 되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공부를 못하는 것이 아이 스스로에게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면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곤 했었다. 전국 꼴찌를 하더라도 아이 스스로 제 삶이 행복하다 여길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이 스스로가 행복하다 여기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기만을 나는 소망했다. 어쩌면 나의 이런 바램이 아이에겐 오히려 더 부담이 되기도 하였던 듯, 어느 날인가 아이가 내게 말했다. “엄마는 왜 내 친구 엄마들처럼 공부해라, 이번 시험 잘 치면 선물 사 줄게... 이번 시험 잘 치면 용돈 많이 줄께..그런 말 안해? 엄마는 내가 공부 잘 하는 게 싫어?” 그 문제를 가지고서 우리모녀는 또 한참을 얘기하곤 했었다. 나는 나의 진심이 가감 없이 아이에게 전달될 수 있게 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아이 또한 제 속마음을 내게 털어놓곤 하였다. 아이들의 성적은 청개구리를 닮았는지 공부해라 고만 하면 더디게 오르는 것이, 공부 못해도 좋으니 건강하게만 자라다오...라고 하면 쑥쑥 잘도 올라주는 것만 같다. 내 아이의 성적 또한 청개구리를 닮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가 육 학년이 되던 해, 드디어 아이에게도 꿈이 생겼다. 뭔가가 되고 싶은 것이 생긴 것이다. 아이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을 잘 가르치고 싶다고 했다. 나는 반가웠다. 직업으로서의 선생님이 아니라, 되고 싶은 꿈이 선생님이라 하니 무척이나 반가웠다. 그 해 가을 담임선생님으로부터 화들짝 놀랄만한 한 말씀을 듣기 전까지 아이의 꿈은 어여쁜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아마 가을소풍을 다녀오던 지하철 안에서였던가 보았다. 선생님께서 물으셨단다. 꿈이 뭐냐고...이 다음에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마침 선생님 옆자리에 아이가 앉아 있었기 때문일 테지만, 아이는 대답을 했을 것이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을 잘 가르치고 싶다고... 아이의 대답을 다 들으신 선생님께서 다음 말씀으로, 아이로서는 단 한번도 꿈에서라도 꿈꿔보지 못했던 말씀을 아이에게 진심을 얹어 격려해주신 모양이다. 그 말씀은 단숨에 아이의 양 볼을 벌겋게 달아오르게 하기에 충분히 차고 넘쳤을 말씀이셨다. “물론 선생님이 되는 것도 좋겠지만, 선생님의 생각으로는 네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검사가 되는 것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너는 충분히 할 수 있을 테고 말이다..” 그 순간 아이는 뭔가 둔중 한 것에 머리라도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 속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자신이 검사가 될 수도 있으리라고는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 날 이후 아이는 제 스스로 꿈을 바꿨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다시 검사의 꿈을 위해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노력하는 아이가 되어갔다. 이번에 또한 나는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은 체 그저 아이의 곁에 묵묵히 존재해 주기만 하였다. 아이 스스로가 행복하다면 아이의 행복은 내게 배가되어 전해지기 때문이다. 아이가 중학교 입학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아이가 배정 받은, 앞으로 삼 년 동안 열심히(?) 다니게될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입학 시 치른 배치고사에서 아이가 전체 일등을 차지했다는 믿을 수 없는 소식과 그래서 입학식 날 신입생 대표 선서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남편도 나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감히 누려보지 못했던 특혜였던 것이다. 입학식 하루 전, 온전히 선서 준비를 위하여 아이는 먼저 중학교 교정을 둘러보고 뿌듯하고 당당하게 발걸음을 떼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어느덧 중학교 삼학년...이번 무더위가 지나고 나면 아이는 고등학교 입학원서를 쓰게 된다. 아이로 인해 그만두었던 직장을 아이 때문에 나는 다시 취직을 했다. 예전에는 생활비를 벌고 아이의 간식과 학원비를 벌기위해 일을 했었는데, 지금은 나 또한 뭔가를 이루고자 아이와 함께 꿈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고자 일을 시작한 것이다. 아이가 없었다면, 가족 때문이 아니었다면 힘든 고비를 잘 헤쳐 나올 지혜도 많이 부족했을 것이며 끝까지 일을 손에서 놓지 않으려 애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상처받은 아이 때문에, 외롭고 허전했을 아이의 마음 허기를 채워 주기 위해서라도 더 노력해야했고,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했다. 그래서 열심히 살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아이는 일 하느라 집을 비우는 엄마 때문에 슬프고 음울한 성장통을 겪어냈지만, 나는 아이 때문에 제대로 어른이 될 수가 있었다. 뭔가 이뤄내고 싶은 꿈이 생긴 것도, 성실한 일상을 지낼 수 있는 밑바탕에는 항상 나를 지탱해 주는 가족이,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아이에게 미안하고, 그래서 아이에게 고맙기만 하다. 사랑하는 내 아이들이 있기에 오늘 하루도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으므로...